[Vol.01] 두 자릿수 성장세 PC, 현실이 된 PC의 미래
두 자릿수 성장세 PC, 현실이 된 PC의 미래
최호섭 ([email protected])
IT컬럼니스트
CES는 가전 박람회로 시작했지만 소비자 가전(Consumer Electronics)의 개념이 점점 넓어지면서 PC, 로봇, 자동차 등으로 그 범위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CES에 PC와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과거 최대의 컴퓨터 박람회였던 ‘컴덱스(COMDEX)’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PC, 컴퓨터는 단순히 연산 장치에 대한 의미를 넘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허브가 됐고, 일상과 업무의 가장 중요한 기기로 성장했다. 또한 PC를 통한 인터넷과 반도체의 성장은 가전의 ‘스마트’화, 그리고 소비자 가전의 개념 확장을 불러온 밑거름이었다.
이번 CES 2021의 반도체 이야기는 그 동안 자율주행이나 인공지능 기반의 가전 등 미래를 내다보는 기반으로서는 다소 시들한 분위기였다. 어쩌면 조금은 더 현실적인 상황을 맞이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단적인 영역이 바로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이다.
숨 고르는 자율주행, 반도체 기술보다 사회적 합의 먼저
자율주행은 지난 10년간 CES의 가장 눈부신 주인공이었다. 전 세계의 완성차 기업들이 CES에 몰려 들었고, 센서와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서로의 존재감을 활발하게 알려 왔다. 수많은 기술들이 새로 선보이면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도로를 읽어냈고, 더 많은 사물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판단하는 반도체의 역할이 자율주행 현실화의 관건이었다.
인텔 모빌아이, 엔비디아는 매년 새로운 프로세서, 혹은 통합 컴퓨터를 내놓으며 2021~2022년을 원년으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이번 CES에서는 자율주행과 관련된 반도체는 공개되지 않았다. 모빌아이는 현실적인 사고의 대응과, 우리 사회가 법적, 제도적, 또 심리적으로 자율주행 자동차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설명하는 데에 집중했다. 어느새 자율주행 기술의 현실화는 2025년경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당장 제도적인 부분의 중요도가 높아지기도 했을 뿐 아니라 이미 반도체는 기능적으로 일정 수준에 올라서기도 했다.
GM이나 메르세데스 벤츠, BMW 등 자동차 회사들 역시 자율주행 기술 그 자체보다, 자율주행이 쓰일 미래 환경과 차량 공간의 변화, 고도화된 차량 통신 기술들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기술보다는 문화적, 환경적으로 자동차의 변화가 더 고민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전도 마찬가지다. 최근 CES에서 주목받는 반도체 중 하나가 TV등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이미지 프로세서다. 처리해야 하는 영상 신호가 4k에서 8k로 올라섰고, 120Hz 주사율과 HDR 등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빠른 이미지 처리가 필수 조건이 됐다. 하지만 LG전자의 알파9을 비롯해 삼성전자, 소니 등의 프로세서는 지난해에 비해 극적인 변화를 꺼내 놓지 않았다.
이번 CES의 반도체 분야에서 미래 기술로 소개된 것은 LED다. LCD 디스플레이에 아주 작은 미니 LED, 혹은 더 작은 마이크로 LED를 촘촘히 심어 OLED 수준으로 밝기 표현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기술이다. 현재 LED 백라이트를 쓴 일반적인 TV가 수 십 개의 LED를 조명으로 쓰는 데 비해, 미니 LED는 3만개, 마이크로LED는 2400만 개가 들어간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로 이 기술들을 쏟아내면서 OLED와 함께 TV 시장의 중심에 LED 수요 증가를 예고했다.
돌아온 PC, 연간 3억대 시장으로 성장
이번 CES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반도체는 의외로 PC였다. 키노트를 맡은 AMD 리사 수 CEO는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PC 판매량이 3억 대를 넘었다고 밝혔다. PC는 지난 10년간 대표적인 사양 산업으로 꼽혔다.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모든 컴퓨팅 패러다임은 모바일로 옮겨졌고,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미디어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영역으로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PC 판매량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2010년 이후 PC는 매년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2018년에는 판매량 2억6천만 대가 무너졌다. 2019년 게이밍 PC의 성장으로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긴 했지만 2억6천만 대 선에 올라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2020년 3억대 판매로 두 자릿수 성장세를 보인 셈이다.
특별히 놀라운 기술이나 굉장한 제품이 나온 것은 아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게임 등 킬러 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PC 시장의 직접적인 영향은 코로나19에서 시작됐다. 지난 한 해 코로나19로 원격 업무와 비대면 수업 등 세계적으로 통신 도구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 영향을 끼쳤다. 리사 수 CEO도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기반 환경으로의 전환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며 디지털 혁신 가속화를 바탕으로 한 가정과 업무 환경의 변화를 강조했다.
인텔과 AMD는 미래를 말하는 대신 당장 시장이 요구하는 프로세서들을 내놓았다. 인텔은 11세대 코어 H 프로세서를 주인공으로 세웠다. 코어 H는 모바일 프로세서로, 두께가 16mm 이하의 얇은 노트북에서 고성능을 낼 수 있도록 만든 CPU다. 최대 8코어 16 쓰레드를 처리할 수 있어 CPU 자체 성능과 멀티 코어 처리에도 유리하다. 특히 11세대 코어 H 프로세서는 4세대 PCI 익스프레스 슬롯을 넣었고, 모바일에서도 최대 20레인의 PCI를 쓸 수 있어서 고성능 GPU를 써도 손실이 없다. 그 동안 모바일에서는 전력과 열 문제로 PCI 익스프레스 슬롯이 4레인으로 제한되었는데, 그 한계를 풀어서 엔비디아의 지포스 RTX 3080처럼 고성능 그래픽카드가 병목 없이 원활한 성능을 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AMD는 라이젠 5000 시리즈 모바일 프로세서를 공개했다. 2020년 하반기 데스크톱으로 공개된 Zen3 아키텍처 기반의 프로세서로 최대 작동속도 4.8GHz에 8코어 16쓰레드까지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모바일 CPU다. 울트라씬 노트북에 쓰이는 라이젠 5000U와 게이밍을 중심에 둔 고성능 라이젠 5000H 등으로 나뉘어서 출시된다.
고성능 노트북 PC의 성장세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게이밍 노트북은 이미 2018년 120억 달러 규모로 이전 5년 사이에 10배 성장했다. PC 게임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데스크톱과 노트북 사이의 칩 성능 차이가 줄어들면서 휴대성과 게임 성능을 두루 갖춘 컴퓨터 시장이 성장하는 것이다. PC 시장이 가라앉는 중에도 고가의 모바일 게이밍 PC는 판매량도, 매출 규모도 꾸준히 늘어 왔다.
엔비디아 역시 가전과 자율주행 자동차, 인공지능 등을 말하기보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앞세웠다. RTX3060 그래픽카드, 그리고 게이밍 노트북을 위한 RTX GPU와 맥스-Q(Max-Q) 플랫폼도 발표했다. 클라우드 게임도 빠지지 않았다. 직접적인 PC, 그리고 게이밍 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인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영상으로 취미를 공유하는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2020년 4월 나스미디어가 조사한 온라인 동영상 관련 설문에서 동영상 시청 시 유튜브를 이용한다는 응답은 93.7%로 나타났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수는 2500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온라인광고협회는 2020년 디지털광고 시장이 전년 대비 20%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시청자 수의 증가세와 함께 시장 규모가 커지고, 콘텐츠 제작자도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텔과 AMD도 새 프로세서에 대해서 개인 영상 제작을 매우 강조했다. 영상을 만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직접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수요가 늘면서 고성능 컴퓨터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게 되는 셈이다. 프로세서 제조사들도 이를 반영해 그래픽 성능과 동영상 처리 능력을 앞세웠다.
원격, 비대면으로 찾아온 PC 시장의 미래
두 회사는 기업의 업무 환경 변화도 프로세서에 반영했다. 인텔은 고성능 노트북 플랫폼 이보(Evo)에 기업용 보안과 시스템 관리 기술인 v프로(vPro)를 더한 ‘이보 V(Evo V)’를 공개했다. v프로는 하드웨어 단에서 보안 위협을 감지, 차단할 수 있고, 기업용 컴퓨터 관리자가 직원 개개인의 컴퓨터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분실이나 고장 등에 대해서도 원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다.
2000년대 센트리노 시절부터 익숙한 기술인데, 인텔이 이를 CEO 키노트에서 다시 발표한 이유는 바로 원격 근무 환경 때문이다. 원격 근무 때문에 사무실과 데스크톱 PC라는 물리적 환경을 넘어 업무 환경, 그리고 데이터가 모두 외부에서 처리되면서 기업들이 PC 관리에 애를 먹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 동안 모바일에 취약했던 AMD도 라이젠 프로 5000 시리즈를 내면서 인텔의 이보V처럼 보안과 시스템 관리에 무게를 둔 제품 라인업을 갖추게 됐다.
이제 보안과 원격 관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됐다. 원격 업무와 협업 도구의 사용은 급격히 늘어나서 국내만 해도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 2020년 국내 기업의 절반 이상이 원격 근무를 시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도 코로나 19 이후 재택 근무 비율이 4배 늘었고, 줌(Zoom) 이용자도 5배나 늘었다. 원격 근무는 코로나 19로 본격화 됐지만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코로나 19 극복 이후에도 계속 이어서 하겠다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PC 시장의 성장세, 그리고 인텔과 AMD, 엔비디아가 다시 PC를 중심에 둔 것은 다소 현실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실제로 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중심 흐름이 된 현재 상황 자체가 PC 시장으로서는 가장 적극적인 미래의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과 학교, 취미 등 일상을 PC로 대신하는 것은 오랫동안 PC 업계가 꿈꿔 온 그림이기도 하다.
시장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아니라 PC라는 것이다. 여전히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PC의 생산성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웹캠과 마이크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인기 있는 고성능 노트북들은 지금도 한 달씩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다. 마침 최근의 인텔과 AMD의 성능 경쟁은 PC 발전과 더불어 재미있는 볼 거리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오랜만에 PC 시장은 성장했고, 성능을 앞세운 새로운 컴퓨터의 수요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인공지능, HPC 등의 미래 기술은 여전히 높은 관심 속에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개인용 컴퓨팅의 중심은 PC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CES 2021의 한가지 메시지다.